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자원 없는 나라의 생존법, 대영제국과 한국은 같은가? <강자의 조건>을 읽고

by 반짝이 다아트 2026. 8. 5.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영국의 주철 대포 이야기가 한국의 반도체와 정확히 같은 공식이라는 걸 알았다. 수백 년의 시차를 두고 전혀 다른 대륙에서 벌어진 일인데, 그 밑에 흐르는 원리는 놀랄 만큼 닮아 있었다.

 

영국 주철 대포와 한국 반도체, 같은 공식?

 

책에 따르면 영국은 처음부터 강한 나라가 아니었다. 당시 대포의 주재료는 청동이었는데, 청동은 비쌌다. 영국은 그 비싼 청동 대포를 마음껏 사들일 만한 형편이 못 됐다. 그래서 눈을 돌린 것이 주철이었는데, 주철은 값이 훨씬 쌌지만 대신 잘 깨지고 터질 위험이 있었다. 다루기 까다롭고 위험한 재료였던 것이다. 그런데 영국은 그 위험을 감수하기로 했다. 싸게 만들 수 있다는 이점을 붙잡고, 주철 대포를 대량으로 찍어냈다. 결과적으로 영국은 더 많은 대포를 배에 실을 수 있었고, 그 화력과 기동성을 앞세워 바다를 장악해 나갔다. 돈이 없어서 어쩔 수 없이 택한 차선책이, 오히려 남들이 따라오지 못할 경쟁력으로 뒤집힌 셈이다.

 

이 대목을 읽는 순간, 나는 자연스럽게 한국을 떠올렸다. 우리나라는 기름 한 방울 나지 않는 자원 빈국이다. 가진 게 없으니 기댈 것은 사람뿐이었다. 그래서 한국은 저렴한 인건비를 무기로 제조업을 일으켰고, 그 제조업의 저력이 차곡차곡 쌓여 오늘날의 반도체 활황까지 이어졌다. 자원이 없다는 결정적인 약점을, 값싸고 성실한 노동력이라는 강점으로 바꿔낸 것이다.

영국의 주철 대포와 한국의 제조업 성장은, 그러니까 같은 문장으로 요약할 수 있지 않을까. 가진 게 없어서 택한 저비용 전략이, 위험을 감수하는 과정을 거쳐 결국 압도적인 경쟁력이 된다는 것. 이건 책이 대놓고 말해준 게 아니라, 내가 영국의 이야기를 읽으며 한국의 현실에 직접 포개어 본 연결이다. 그렇게 이어놓고 보니, 강대국이 되는 원리에는 시대와 국경을 넘어 관통하는 무언가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치킨게임인 줄 알았는데, 자원 없는 나라의 생존법

 

솔직히 이 책을 읽기 전까지, 나는 한국의 반도체 산업을 일종의 포기하지 못한 치킨집이라고만 생각했다. 서로 물러설 수 없어서, 멈추는 순간 지는 게임이니까 어쩔 수 없이 계속 밀어붙이는 것. 막대한 돈을 쏟아부어 증설하고 또 증설하며, 상대가 먼저 나가떨어지기를 기다리는 소모전. 끝을 알 수는 없지만 들인 돈과 시간이 너무 많아서 이제와서 다른 산업을 기웃거릴 수 없기에 그냥 이어나가는 것. 나에게 반도체 시장은 그렇게 위태롭고 어딘가 비합리적인 시장으로 보였다.

그런데 이 책을 읽고 나서 그 생각이 바뀌었다. 그것을 단순한 치킨게임이 아니라, 자원 없는 나라가 살아남기 위한 생존법으로 다시 보게 된 것이다. 강대국의 조건을 이야기하는 이 책은, 결국 약점을 강점으로 뒤집어낸 나라들의 이야기였다. 그 관점에서 보니 한국의 반도체 경쟁은 단지 기업들끼리의 치킨게임이 아니었다. 자원이 없는 나라에서 개인은 개인대로 더 성실히 일하고, 기업은 기업대로 사활을 걸고 기술에 투자하고, 나라는 나라대로 그 산업을 떠받치려 애쓰는, 온 사회가 함께 벌이는 생존의 몸부림이었다.

같은 현상인데 렌즈 하나를 바꿔 끼웠을 뿐인데, 전혀 다른 그림이 보였다. 위태로운 소모전으로만 보이던 것이, 가진 게 없는 나라가 어떻게든 살아남으려고 총력을 다하는 절박한 노력으로 다시 읽힌 것이다. 그러자 그 경쟁을 바라보는 내 마음도 달라졌다. 안쓰럽고 위태롭게만 여겼던 그 싸움이, 사실은 우리가 여기까지 버텨온 방식 그 자체라는 걸 인정하게 됐다.

 

로마 원로원의 나태함, 한국 국회가 겹쳐 보인 이유

 

이 책은 강대국이 어떻게 일어섰는지만이 아니라, 어떻게 무너졌는지도 함께 보여준다. 그중에서 내 마음에 오래 남은 것은 로마였다. 한때 세계를 호령했던 로마가 서서히 기울어간 배경에는, 나라의 중심을 잡아야 할 원로원의 나태함이 있었다. 기득권에 안주하고 제 잇속을 챙기는 데 익숙해진 지도층이, 결국 거대한 제국을 안에서부터 갉아먹었다는 것이다.

이 장면에서 나는 한국의 국회를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정치를 잘 안다고 할 수는 없지만, 뉴스를 볼 때마다 나라 전체의 앞날보다 각자 진영의 셈법이 먼저인 것 같아 답답할 때가 많았기 때문이다. 나라의 방향을 정하는 사람들이 나라보다 당의 이익을 먼저 따지는 모습이, 안주하다 스러져간 로마 원로원의 그림자와 자꾸만 겹쳐 보였다.

 

그래서 이 책을 덮으며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약점을 강점으로 바꿔낸 나라도, 정작 그 중심을 지켜야 할 사람들이 나태해지는 순간 안에서부터 무너질 수 있다는 것. 강자의 조건이란 결국 값싼 노동력이나 뛰어난 기술 같은 것만이 아니라, 나라를 이끄는 사람들이 끝까지 안주하지 않고 애쓰느냐에 달려 있는 게 아닐까. 자원 없는 나라가 여기까지 온 것이 온 사회의 몸부림 덕분이었다면, 그 몸부림을 헛되게 만들지 않는 것 또한 위에 선 사람들의 몫일 텐데. 나는 그 대목에서, 우리가 애써 쌓아 올린 것들이 부디 안에서부터 허물어지지는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됐다.


소개 및 문의 · 개인정보처리방침 · 면책조항

© 2026 블로그 이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