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웹소설 플랫폼에서 조회수 상위권만 찾아보다 보면 어느 순간 비슷한 설정만 반복되는 느낌이 들 때가 있습니다. 저도 그런 편향된 독서 패턴에서 벗어나고 싶어 새로운 작품을 찾던 중 <전직 황후가 능력을 (대충) 숨김>이라는 직관적인 제목의 작품을 발견했습니다. 제목처럼 내용도 명확했고, 주인공 엔실렌의 능력치를 보며 진심으로 부러웠습니다.
빙의물인데 복수보다 세무조사가 먼저
일반적인 빙의물은 주인공이 새로운 몸에 적응하며 혼란스러워하는 과정을 그립니다. 여기서 빙의물(Transmigration)이란 한 인물의 영혼이나 의식이 다른 사람의 몸으로 옮겨가는 설정을 의미하는 장르 용어입니다. 그런데 이 작품의 주인공 엔실렌은 황후였던 전생에서 리아넬의 몸으로 깨어난 뒤에도 감정적 동요보다는 상황 분석을 먼저 합니다.
전생에서 자신을 이용했던 황제 아실을 다시 마주했을 때, 저라면 분노와 두려움이 먼저 앞섰을 것 같은데 엔실렌은 그러지 않아요. 실제로 직장에서 제 성과를 가로챈 부장을 만날 때마다 속이 끓어올랐던 기억을 떠올려보면 어떻게 저렇게 평온하게 반응을 할까 싶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엔실렌은 달랐습니다. 손끝이 떨리는 순간에도 냉철하게 상황을 판단하고 대응하는 모습이 MBTI의 T(사고형) 성향 그대로였습니다. 독자 입장에서는 '그래서 뭐 어쩔 건데'라는 태도에서 오히려 카타르시스를 줍니다.
작품의 핵심 소재는 세무조사입니다. 엔실렌이 '특별과세국'이라는 기관의 말단 공무원으로 빙의하면서 세법(稅法)을 무기로 활약하는데, 세법이란 국가가 조세를 부과하고 징수하는 절차와 기준을 정한 법률을 뜻합니다. 이 작품에서는 탈세와 횡령을 일삼는 경제사범들이 악역으로 등장하고, 엔실렌이 세무조사를 통해 이들을 응징하는 구조입니다(출처: 문화체육관광부 웹소설 장르 연구).
읽으면서 놀라웠던 부분은 범죄자를 마주해도 엔실렌의 우선순위가 '세금 징수'라는 점이었습니다. 이런 일관성이 캐릭터를 더 입체적으로 만들어 준다는 생각이 듭니다.
대충 살고 싶은데 인정받는 역설
작품 제목의 '대충'이라는 단어가 주는 매력이 상당합니다. 엔실렌은 전생에서 황후로 살며 모든 걸 완벽하게 해냈지만, 이번 생에는 힘을 빼고 '대충' 살려고 합니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주변 사람들은 그녀의 '대충'에 경악하며 오히려 더 인정하게 됩니다.
저도 회사에서 완벽주의로 일했을 때보다, 적당히 선을 긋고 일했을 때 오히려 평가가 좋았던 경험이 있습니다. 엔실렌의 이런 태도는 현대 직장인들이 공감할 수 있는 '일과 삶의 균형(Work-Life Balance)'과도 맞닿아 있습니다. 여기서 워라밸이란 업무와 개인 생활 사이의 조화를 추구하는 개념으로, 최근 MZ세대를 중심으로 중요한 가치관으로 자리 잡았습니다(출처: 고용노동부 근로환경 조사).
작품 중반까지 엔실렌이 리아넬의 몸에 빙의하게 된 이유가 명확히 드러나지 않아 다소 뜬금없다는 느낌도 들었습니다. 하지만 후반부로 가면서 복선(伏線, Foreshadowing)이 모두 회수됩니다. 복선이란 이야기 전개에서 미리 암시를 깔아두었다가 나중에 연결하는 서사 기법을 말합니다. 이 작품은 다른 판타지 로맨스에 비해 복선 회수 과정이 기계적이고 논리적이라는 점이 오히려 차별화된 매력으로 느껴졌습니다.
주변 인물들이 엔실렌의 '대충'에 반응하는 장면들은 제게도 묘한 동기부여를 줬습니다. 저 역시 '대충교'에 입교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완벽함보다는 적당함에서 오는 완성의 미학을 보여준 작품이었습니다.
판타지 설정과 현실 디테일 사이
이 작품에는 세금, 회계, 직장 문화 같은 전문적인 영역이 등장합니다. 댓글에서 현실과 동떨어진 부분이 있다고 지적하기도 했었는데요. 실제로 왕실과 행정부가 공존하는 설정 자체가 현대 민주주의 체제와는 거리가 있잖아요. 이 작품의 세계관은 애초에 판타지라는 걸 생각하면 그렇게까지 현실적 용어와 씽크를 일치해야하나 하는 의문이 좀 남습니다.
왕실이 존재하고 특별과세국이라는 가상의 조직이 작동하는 세계 자체가 픽션(Fiction)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현실의 세무 시스템과 정확히 일치하지 않더라도 정직 처분과 대기 발령의 제대로 된 용어 사용이 아님이 이야기의 재미를 해치지는 않는다는 생각입니다. 어차피 픽션이란 사실이 아닌 허구로 창작된 이야기를 뜻하며, 독자는 이를 받아들이는 '신뢰의 유예(Suspension of Disbelief)' 태도를 갖는 것을 전제로 하니까요.
다만 일부 답답한 전개나 로맨스 라인에서 아쉬운 부분이 있는 건 사실입니다. 엔실렌과 아실의 나이 차이가 얼마나 되는지 명확하지 않고, 아실이 원래 엔실렌을 좋아했다는 설정도 엔실렌을 향한 이전 인연들의 감정들도 그냥 글 줄 하나로 좋아했는데 정도로만 다뤄져서 다소 갑작스럽게 느껴졌습니다. 스토리의 개연성이나 구조적 탄탄함을 기준으로 보면 분명 아쉬운 점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제가 이 작품을 추천하는 이유는 명확합니다. 주인공 엔실렌이 자신의 능력을 숨기려고 하는건지 생각이 없는건지 싶은 행동도 일관되며, 그 과정에서 주는 통쾌함이 상당하기 때문입니다. 작품 속에는 "360도 돌아서 멀쩡해 보인다"는 표현이 나오는데, 이는 엔실렌의 묘하게 어긋난 행동을 표현한 유머 코드입니다. 이런 마이너한 유머 감각을 즐기는 독자라면 충분히 만족할 수 있는 작품입니다.
2025년 12월에 연재를 시작해 빠르게 완결된 작품이라는 점에서 최근 웹소설의 트렌드를 보시게 되지 않을까 싶고 컴팩트하게 구성된 이야기를 한 번에 몰아보고 싶은 분들께 추천합니다.
완벽주의에 지쳐 있거나, 세무조사처럼 독특한 소재의 판타지를 찾고 계셨다면 한 번쯤 읽어볼 만합니다. 저는 이 작품을 읽고 나서 제 삶에도 '대충'의 여유를 조금 더 허용하게 되었습니다. 엔실렌처럼 대충 살면서도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는 삶이 부러워지는 오늘이네요.